지도도 시가 될 수 있을까?

2018년 2월부터 마포중앙도서관 집필실에 입주해 있다.
3개월의 기간이 곧 끝나지만 2기도 신청해서 10월까지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이용 조건으로 청소년을 위한 기고문을 한 달에 한 편씩 써 내야 한다.
글이란 걸 잘 안 쓸 뿐더러 청소년을 위한 글이라니 뭘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내가 쓸 수 있는 글을 쓰기로 했다.
그중 하나를 일단 올린다.
기고문은 도서관 홈페이지나 <내 고장 마포>에 실릴 수 있다고 한다.

이 글은 1년 넘게 하고 있는 독서 모임을 하던 중에, 정확한 맥락은 기억이 안 나지만, '스탠퍼드철학백과'에 대한 얘기를 꺼냈던 것이 생각나서 주제를 잡게 됐다.
그 사전에 대한 인상적인 글을 접하고서 트위터에 아래와 같은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이 트윗에서 뻗어가는 이야기다.
(스탠퍼드철학백과의 콘텐츠는 전기가오리에서 항목별로 번역을 해 출판하고 있다.)



내가 번역한 책에 커다란 애정 같은 것을 품지는 않지만, 『모든 것은 노래한다』만은 조금 다르다. 그냥 나에겐 되게 특별한 책이다. 그래서 스탠퍼드철학백과와 이 책, 두 가지를 결합해서 썼다.
(부제는 청소년을 위하여... 막판에 붙여봤다.)


지도도 시가 될 수 있을까? — 쓸모없고 이상한 지도책 이야기


위키피디아는 사용자들이 직접 글을 쓰고 편집하는 온라인 백과사전이다. 정보의 양에 제한이 없고 업데이트가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등의 장점이 있지만, 누가 썼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책으로 된 백과사전에 비해 신뢰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각 항목을 서술하는 문체는 전통적인 백과사전 못지않게 한결같이 짐짓 객관적이어서 우리는 그 내용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곤 한다.

미국의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스탠퍼드철학백과’라는 웹사이트가 있다. 철학이라는 주제에 한정된 온라인 백과사전으로, 위키피디아와 달리 어떤 항목에 대해 잘 아는 전문가가 이름을 내걸고 그 항목을 서술하며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도 한다. 이름을 내건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뜻이기에 자료 조사를 허투루 하거나 잘못된 내용을 날조할 가능성은 적은 한편, 글쓴이의 목소리가 글 속에 녹아들게 된다.

백과사전이 그래도 되는 걸까? 백과사전은 객관적인 지식을 객관적으로 전달해야 하는 것 아닐까? 글쓴이의 주관적인 생각이 들어간 백과사전의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단어의 뜻을 모를 때 찾아보는 사전,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이 궁금할 때 찾아보는 백과사전, 어떤 도시가 어느 나라에 있는지 알고 싶을 때 꺼내 보는 지도책 따위를 우리는 ‘사실’을 알려주는 참고 서적으로 취급한다. 그렇기 때문에 참고 서적은 다른 어떤 책들보다 더 강력한 권위를 지닌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자. 정말로 객관적인 사실만을 담고 있는 책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책은 사람이 쓰고 엮고 만든다. 백과사전이나 지도책 같은 책에도 만든 사람의 생각과 주장이 알게 모르게 담겨 있을지 모른다. 이런 의심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차라리 그 생각과 주장을 애써 숨기지 말고 드러내는 건 어떨까?

스탠퍼드철학백과가 백과사전임에도 글쓴이의 이름과 목소리를 숨기지 않기로 정한 방침은 아마 이런 의심과 발상의 전환에서 출발했을지도 모른다. 지도책에도 비슷한 예가 있다. 『모든 것은 노래한다: 이야기하는 지도들』(프로파간다, 2015)은 지도책이지만 길을 찾기 위한 참고 서적이라기보다 소설책 혹은 시집에 가깝다. 발상의 전환을 한껏 밀어붙인 것이다. 제목이 말해 주듯 여기에 실린 지도들은 ‘노래’하고 ‘이야기’한다. 미국의 지리학자 데니스 우드가 제자들과 함께 만든 동네 지도들을 묶은 이 책은 한 조그만 동네가 품은 갖가지 이야기를 여러 장의 ‘이상한’ 지도를 통해 들려준다. 각 지도에는 예를 들어 개 짖는 소리가 난 위치, 가로등 불빛, 신문이 배달되는 경로 같은 것만 표시되어 있다. 일반적인 지도의 실용성은 이 책의 관심사가 아니다. 책날개에는 다음과 같은 소개글이 있다.

“각각의 지도는 보이지 않는 것,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것, 하찮아 보이는 것에 눈을 맞춘다. 공기 속으로 침투하는 라디오 전파부터 포치에 내놓은 핼러윈 호박까지, 그는 지도로 만들어진 적이 없을뿐더러 지도로 만들 수 없을 것만 같은 사물에서 우리가 몰랐던 사실을 알려주는 통찰을 찾아낸다.”

나무, 개, 건물, 신문, 밤하늘 등등 동네에 존재하는 온갖 다양한 것들이 지도의 주인공이 된다. 한 장의 지도에는 그 주인공만 남고 다른 정보는 뒤로 물러나거나 아예 사라진다. 지도의 가장 기본적인 뼈대로 여겨지는 길마저도.

우리가 당연시하는 정보,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지식에 대해 의심을 품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그러면 비로소 객관적인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 권위와 실용성을 해체하고 뒤집어 본다면, 우리의 세계는 더욱 넓고 풍성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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